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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일시 2014년 5월 8일 오전 10시~오후 12시 30분

    장소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한미타워 19층 한국사진문화연구소

    구술 이남주(李男柱, 1939~, 이해선 질녀)

    이길주(李吉柱, 1958~, 이해선 차남)

    면담 최봉림(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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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이해선 선생 관련 첫 인터뷰입니다. 우선 선생님들이 사진계 인사가 아니시기 때문에요. 본인

    소개, 가능한 한 조금 자세히 [본인] 소개[를] 해주십시오.

    남: 저는 이름은 이남주이고요. 그 이 ‘해(海)’ 자 ‘선(善)’ 자 분의 조카예요. 큰아버지 되세요.

    ‘해’ 자 ‘선’ 자 분이. 큰아버지 되시고, 우리 아버지 형님이시죠, 큰형님. 그리고 저는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피아노 교수였어요. (웃으며) 그래서 큰아버지께서 항상 농담을 하셨죠. 그 피아

    노에 대해서, 아주 유머러스하게. “그 뚱땅거리는 것도 학문이라고 했느냐?” 그러셨죠. (웃음)

    네. 음악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최: 그러면 고조부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남: 저의 고조부요?

    최: 예.

    남: 흥, 흥완군.1)

    최: 흥완군이시고.

    남: 흥완군이신데.

    최: 이정응.

    남: 이하, 아휴 (탄식)

    최: 이정응이시죠?

    남: 아니, 아니요. 정응 씨는 아니고. 아휴 (탄식), 이하…… ‘하(昰)’ 자 ‘응(應)’ 자는 대원군(大院

    君)이시구.

    최: 대원군이시구요.

    남: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최: 흥완군 이정응.

    남: 흥완군.

    최: 네. 이정응.

    남: 글쎄. 정응 같지는 않았는데.

    최: 저희들이 찾아 본 바로는 {남: 네네.} 이정응이시구요.

    남: 네.

    최: 그러면 할아버님이 이재완?2)

    남: 증조할아버지.

    최: 증조할아버지가. {남: 네네.} 이재[완], 고조부가 이제 [이정응], 이재완 혹은 이재원이라고 하는

    데 어떤 게 맞습니까?

    길: ‘재(載)’ 자 ‘완(完)’ 자가 맞죠.

    남: 완.

    최: ‘완’ 자가 맞습니까? 다른 자료에는 이재원이라고도 많이 표기가 돼 있어서요.

    남: 완순군(完順君)이시죠. 그분이.

    13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길: 이길주남: 이남주최: 최봉림

    1)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1814~1848). 조선 시대의 문신, 왕족이다. 은신군(恩信君)의 양손자이며 남연군이구(李球)와 군부인 여흥민씨(郡夫人 驪興閔氏)의 둘째 아들이다. 흥인군(興寅君),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형이며 흥녕군(興寧君)의 동생이다.

    2)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1855~1922).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이며,사도세자의 현손이다. 1899년에 완순군에봉작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 일본 황실로부터 후작으로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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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네. 완순군 이재완. {남: 네.} 그리고 흥완군 이정응.

    남: 네. 그 함자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최: 그러니까 고종의 사촌 되시고요.

    남: 저 완순군께서. {최: 예예.} 네.

    최: 고종의 사촌 되시고요.

    남: 흥완군은…… 대원군의

    최: 형님 되시고요.

    남: 형님 되시고요. 둘째 형님. 둘째 형님이시고요.

    최: 네. 죄송하지만 어느 대학의 음대 교수셨나요?

    남: 저요?

    최: 예.

    남: 지금은 가톨릭대학이지만 옛날에 성심여대3).

    최: 성심여대.

    남: 네. 춘천에. {최: 네네.} 성심여대.

    최: 성심여대이시고요. 예. 이길주 선생님, 자기 소개 좀 해주세요.

    길: 네. 저는 ‘해’ 자 ‘선’ 자 되시는 분이 제 선친이시고요. 늦둥이죠, 제가. (웃음) 오십이 넘어서

    보셨으니까요. 그리고 제 위로 형님이 계셨고, 누님이 계셨는데. 워낙 나이 차가 많다 보니까

    두 분은 지금 시점에서는 다 돌아가셨고. 음, 저는 그냥 뭐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회사 퇴직하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상태이고요. 뭐

    안타깝게도 아버님이 하시던 그 사진 일은 (면담자를 향해 웃으며) 이어받지를 않았고 (허허 웃

    으며).

    최: 예, 이해선 선생님 말씀으로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이해선 선생님, 1905년생이시구요, 1983년

    에 작고하셨고요. 어디에서 출생하셨나요?

    남: (이길주 선생을 보며) 서울에서 출생하셨죠, 당연히.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최: 예. 가회동이시구요.

    남: 네.

    최: 가회동. 언제 그럼 안국동으로 이사를 하셨나요?

    남: 어, 아주 오래 전에 그 집을 지으셨어요, 안국동 집을. 지금은 그 집을 이 얘가 (이길주 선생쪽으

    로 머리를 기울이며) 이제는 거기다가 빌딩을 지었지만. 그 안국동에 집을 지으시고 아주 프라

    우드(proud)하게 생각하시고. 그 나무가 보통 나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기억을 못

    해요. {최: 한옥의……} 한옥. 예. (고개를 끄덕이며) 한옥인데 그 [지은] 나무, 그게 보통 나무가

    아니라고 설명하셨는데 제가 기억할 수가 없어요.

    길: 이사하신 시점이 6·25 [동란이] 끝난,

    최: 6·25 직후?

    14

    3) 성심여자대학교. 성심수녀회에서 설립,운영하였던 사립대학으로, 1994년 가톨릭대학교와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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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4) 이달용(李達鎔, 1883~1948). 조선의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 교육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종손(從孫)이며, 고종의 5촌 조카이다. 일제강점기에 아버지이재완의 조선귀족 작위를 물려받았다.

    길: 직후에 {남: 예.} 이사하시고 집을 지으셨던 걸로, 저는 그렇게 들었던 걸로 {남: 예.} 기억을 해

    요.

    남: 예.

    최: 가회동에서 사시다가 인제 안국동에 집을 지으셔 갖고 이사를 가신 건가요?

    길: 네네.

    최: 그러면 그때, 완순군 이재원,

    남: 이재완.

    최: 이재완. 네, 이재완. 그분도 그때 같이……

    남: 아, 그분은 옛날에 돌아가셨죠. 근데 큰아버지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며) 살아 생전엔 아마 같이

    {최: 네.} 큰아버지의 할아버지시니까.

    최: 1948년에 작고하신 걸로.

    남: 48년은 우리 할아버지. ‘달(達)’ 자 ‘용(鎔)’ 자.

    최: 이달용4). 예, 예예.

    남: 네네. ‘해’ 자 {최: 예. 48년, 예.} ‘선’ 자의 아버지. {최: 예, 맞습니다.}

    남: 근데 완순군은 증조할아버지니까……

    최: 네. 더 일찍, 예, 돌아가셨구요.

    남: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애기 때는 아마 계셨을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완순군께서.

    최: 우선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들으신 바가 계신지요?

    남: 성장과정은 물론 모르지만. 엄격, 아주 우리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엄격하시고.

    최: 이달용 선생님께서요?

    남: 네. 굉장히 엄격하시고. 또 극에서 극으로 굉장히 자애로우시고. 그 다음에 그 옛날 집안의 그

    질서와 그 대가족의 그 질서. 할아버지 말씀이 곧 법이죠. (웃음) 할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

    시든 아-무도 거기에 대해, 불복종을 하거나 [하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하죠. 근데 뭐 억지를

    부리시거나 그런 분은 아니셨어요. 아주 엄격한 질서를 아주 완-벽하게 지키시는 그 옛날 분

    의. 그런 밑에서 큰아버지께서 아마 예술에 대한 생각을 — 나는 물론 태어나기 전이니까 모르

    지만 — 큰아버지[께서] — [지금] 이렇게 회고해보면 — 어떻게 그런 집안에서 그러한 생각을

    (웃음) 하셨을까 할 정도로. 생장과정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큰아버지의 그 예술성에 그 성격

    하고, 할아버지하고 아주 어려서부터 대립하지 않으셨나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생각을 해요.

    나는 뭐 들어본 적은 없고 그렇지만. 아주 어려서는 제가 모르고요. 이제 나중에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걸 제가 직접 [추측해보면] 할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을, (웃으며) 아버지 생각대로라

    면 항상 갓에, 도포에 갓을 쓰고 할아버지, 아버지 옆방에 가만[히], 이렇게 대기하고 있다가

    “아무개야” 하면 “네.” 하고 (웃으며) 나타나야 되는 그런, 그래야 되는데 큰아버지께서는 절대

    로 그러실 수가 없으니까. (웃으며) 이제 할아버지하고 굉장히 불목하셨고…… 불목 정도가 아

    니라…… 그런데 우리 이씨 성격들이 모두 칼이에요. 칼이기 때문에 불목을 하고 뭐, 항상 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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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탕퉁탕 그게 아니라, 한번 딱 마음을 정하시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큰아버지는 (웃

    으며) 그런 집안의 장자로서 예술을 하시느라고 집을 나가셨으니까 내놓은 자식이고. 이제 그

    러셨어도 그런 면에서만 불목하셨다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고.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일본

    유학시절에 다 경제적으로 서포트(support)하시고. 큰어머니도 ‘내외가 같이 살아야 된다’하

    시고 [일본에] 보내주시고 그랬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최: 저, 이달용. [이남주 선생님의] 할아버님이시죠. {남: 네.} 이해선 선생님의 아버님. {남: 네 네.}

    후작(侯爵)5)의 칭호를 유지하셨죠? {남: 네. 그랬죠.} 일제강점기 때 {남: 네네.} 그러면 그……

    뭐라고 얘기하나. 생활에 대한 것은 소위 일본 황실 그쪽에서 여유 있게 경제적으로……

    남: 그 황실 쪽에서 준 것은 모르겠구. 우리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부와 귀를 겸비한 분이셨어요.

    최: 아, 예.

    남: 재산이 많으셨어요. {최: 예.} 할아버지 자신이.

    최: [이해선 선생은] 어느 소학교를 다니셨나요?

    남: 제가 듣기로는 종로소학교6)로 들었어요.

    최: 종로소학교요?

    남: 네.

    최: 그때 그 이왕가7) 분들은 거의 일출심상소학교8). 덕혜옹주9)님도 거기 다니셨구요. 충무로 지금

    극동빌딩 자리인데. 혹시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남: 그 덕혜마마는, 그, 제가 듣기로는 그…… 아, 그 소학교는……

    최: 일출심상소학교거든요.

    남: 근데.

    최: 그 학교를 다니시다가 일본으로 가셨죠. 도일(渡日)하셨죠. 그래서.

    남: 고종황제께서 덕수궁에 유치원을 설치하셨다는 {최: 네네.} 말은 들었어요.

    최: 예. 예. 맞습니다.

    남: 김을한 씨10). 김을한 씨 부인이 덕혜마마하고 저 유치원 동창이시라서, 김을한 씨께서 왕가에 대

    한 관심이 많으시고, 그랬다는 얘길 들었는데, 소학교는 모르겠어요.

    최: 일출심상소학교에 대해서는 {남: 네.} 들어보신 적이 없으시고……

    남: 못 들어봤어요. 제가 어려서 물론 몰랐던 거죠.

    최: 음…… 하여간에 그때 이왕가 분들. 그리고 일제 엘리트 고급 관료들. {남: 네.} 자제 분들이 다

    닌 학교로 {남: 네……} 돼 있거든요. {남: 네.} 그럼 중학교는 어느 중학교를 다니셨나요?

    남: 중학교는,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고) 얘 말로는, 저는 생각이 안나요. 경기. 지금의 경기.

    최: 경성중학교겠죠?11)

    남: 그렇죠, 경성.

    최: 경성중학교. 네. 1918년 이해선 선생님이 열세 살 때요. {남: 네.} 충정공[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1905) 여식과 {남: 네.} 결혼했다는 {남: 네네.}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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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10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황실령제14호,〈조선귀족령〉(공·후·백·자·남의오작이 있는 조선판 화족(華族)제도)이 공포되면서 이재완은 후작에 봉작되었다. 1922년10월, 후작의 작위를 아들 이달용이 상속하였다.

    6)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京城鐘路公立尋常高等小學校)의 약칭.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에 설립된 공립 교육시설이다. 정규 소학교(심상과)에 고등과 교육과정이 부설되어 있는 학교이다.

    7) 이왕가(李王家)는 일제에 의하여 격하된대한제국의 고종과 순종의 가족을 이르는 말로 1910년부터 1947년까지 사용되었다.

    8) 1889년 8월 당시 한성에 거류하고 있던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시기에 따라, 경성제일심상고등소학교,경성히노데심상고등소학교, 경성히노데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변경되나 흔히 히노데소학교(日出小學校)로 칭했다.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국외에 소재하는 일본인 소학교의대표’로 칭해진 명문교로 알려져 있다. 조선국민 중 양반 이상 왕족에 해당하는 중등 이상의 종족(種族) 중 제국경성영사의 허가를받은 자’에 한해 입학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다녔다. 위치는현재 서울 중구 필동 극동빌딩 자리로, 해방후 한때 서울일신국민학교로 사용되었다가없어졌다.

    9) 덕혜옹주(1912~1989). 고종의 고명딸로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1년 쇼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와 결혼, 1955년 이혼하고 1962년에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귀국했다. 정신질환으로 요양하다,1968년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10) 김을한(1905~1992). 1920년대부터 『매일신보』, 『조선일보』, 『만몽일보』, 『서울신문』 등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덕혜옹주의1962년 환국을 추진했다.

    11) 1909년 경성거류민단에 의해 설립된 일본인 중학교로, 당시 총독부에 근무하는 관원들의 자제들이 주로 다녔던 중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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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12)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였고,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정치활동의근거지였다.

    13) 맹현(孟峴)은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뒤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 일대로, 흥완군 이재완의 후손들이 대대로살던 집의 이름, 즉 택호이다. 사대부 밀집지역인 북촌에 위치해 왕실과 반가 모두와 긴밀하게 교류하여 독특한 문화를형성했다.

    14) 사동궁(寺洞宮)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었던 대한제국 고종의 5남 의친왕의 사저이자 친왕부(親王府)이다.

    15) 고종(1852~1919)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며, 장자는 흥친왕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이다.

    16) 흥친왕 이재면의 장남은 영선군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이며, 차남은 이문용(李汶鎔, 1882~1901)이다. 여기서 앞지밀 할아버지는 흥친왕 이재면을, 뒷지밀할아버지는 영선군 이준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7) 지밀(至密)은 지극히 은밀하고 비밀스럽다는 의미로 임금이 거처하던 곳을 이르는 말이었으며, 각 궁방(宮房)의 침실을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18) 의친왕의 차남 이우( ,1912~1945)공은 영선군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해선 선생의 동생, 이해명(李海明)은이문용의 양자로 입적된 것으로 보인다.

    남: 맞아요.

    최: 예. 그분에 대해서 좀 들으신 바가 계신지요? {남: 우리 큰어머니?} 예.

    남: 큰어머니가 굉장히, 큰어머니께서 굉-장히 미인이셨고. 그리고 그 옛날 분 치고 성격이 굉장히

    활달하시고. 그리고 우리 어머니, 큰어머니는 첫째시고. 둘째 아버지는 운현궁(雲峴宮)12)으로

    양자를 가셨고. 그래서 이제 우리 아버지가 맹현13)에서는 큰아버지 다음인데. 항상 우리 어머니

    는 그냥 얌전하고 수재고, 그냥 나대시는 분이 아닌데, 큰어머니께서는 그 시절에 이미 파마를

    (웃으며) 하시고.

    최: 둘째 분이 양자, 운현궁의 양자로 가셨으면 {남: 양자로 가셔서} 대원군의 직계 그쪽으로 양자로

    들어가셨다는. {남: 그렇죠.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남: ‘해(海)’ 자 ‘명(明)’ 자. 네네, ‘해’ 자 ‘명’ 자예요. 저 ‘밝을 명’ 자. ‘바다 해’ 자. 우리 큰아버

    지 바로 밑의 분.

    최: 네. 그러면 순종(純宗, 1874~1926), 영친왕(英親王, 1897~1970), 의친왕(義親王, 1877~1955).

    그쪽과 같은……

    남: 아니요. 의친왕 전하는 사동궁14)이고. 운현궁은 고종 황제의 생가죠. {최: 예예.} 그래서 이제 고

    종황제의 형제 분이 계셨죠. [고종황제는 대원군의] 둘째 아드님이죠. {최: 예예.} 대원군의 둘

    째 아드님. 운현궁은 대원군의 큰아드님15)의 후손이죠. {최: 음} 그래서 큰아드님이 우리는 앞지

    밀 할아버지라고 그랬는데. 앞지밀 할아버지께서 아드님이 두 분 계셨어요.16) 그래서 큰아드님

    은 뒷지밀 할아버지라고. 그 뒷지밀 할아[버지]

    최: 뒷……

    남: 뒷-지밀. 지밀상궁. 지밀이라는 게 뭔지……

    최: 뒷지밀?

    남: 지밀.

    최: 뒷, 앞. 앞뒤 할 때.

    남: 예. 지밀.

    최: 요즘엔 쓰지 않는 말이어서. 예.

    남: 그렇죠. 요즘에 우리들도 안 쓰죠.

    최: 지밀. 지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시구요? 17)

    남: 무슨 방이라든가 뭐.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냥 어려서부터 (손짓을 하며) 썼기 때문에 그래

    서. (손짓으로 앞 뒤를 가리키며) 앞지밀 할아버지께서는 대원군의 큰아드님이시고. 뒷지밀 할

    아버지는 그 앞지밀 할아버지의 큰아드님이시고. 그런데 앞지밀 할아버지께서는 고종황제의

    형님이죠. 아드님이 두 분 계셨어요. 그래서 큰아드님[이신] 뒷지밀 할아버지[께]는 이우 공. 그

    러니까 의친왕의 아드님이 인제 양자로 가시고. 그 둘째 아드님한테는 우리 둘째 아버지께서,

    ‘해’ 자 ‘명’ 자 아버지께서 [양자로]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18)

    최: 양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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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네네.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최: 충정공 여식? 예예. 이해선 선생님.

    남: 큰아버지께서 결혼을 하셨는데, 우리 큰어머니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굉장히 활달하고 아주 현

    대적인 감각을 가진 그런 분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나온 아주 수재. (웃음) 수재

    여서 우리 할아버지께서 며느리로 삼으셨는데, 그냥 복종형이고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그래서

    우리 큰어머니께서 우리 어머니한테 맹추라고. (웃음) 항상 맹추라고. 답답하다고. 그러실 정도

    로 큰어머니께서는 아주 활달한 그런 성격을 가지셨다고.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태어나기 [전에]. 옛날에 폐결핵을 앓으셨어요.

    최: 아.

    남: 그래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최: 신여성이라고 해도 무방하신 분이네요.

    남: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죠. (웃음) 우리 어머님 말씀으로는, 그러니까 그런 집안에서 어

    떤 면에서는 (웃으며) 큰아버지하고 같은 [면이 있으셨죠.] 큰아버지도 이를테면 그렇고.

    최: 굉장히 개방적이시고.

    남: 네. 그러셨는데.

    최: 깨이신 분이었고.

    남: 네. 고종황제께서 민 충정공을 굉장히 사랑하셨죠.

    최: 그렇죠.

    남: 그래서 우리 큰아버지께서 창덕궁에, 옛날에 임금님이 타시던 가마 그런 것을 진열해 놓은 데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거를 내가 타고 장가를 갔다.”고[말씀하셨어요]. (손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고종황제께서 내가 장가가던 날, 당신이 탄 이 가마, 이것을 빌려주셨다.”고. 그러니까 그 무슨

    마차 같은 거였어요.

    최: 충정공한테요?

    남: 우리 큰아버지한테요. 새신랑한테. {최: 예예.} 새신랑 장가갈 적에. 그러니까 [고종께서] 충정공

    을 굉장히 사랑하시고. 그리고 또 우리 할아버지, ‘달’ 자 ‘용’ 자 {최: 예.} 운현궁 할아버지[께

    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이씨 집안에서는 우리 집을 맹현이라고 그랬어요. 맹현.

    운현궁, 맹현 그리고 창덕궁. 운현, 맹현, 이렇게 같은 동네에 있어서 아침마다 궁에서 옛날에

    는 정감(廷監)이 정복을 입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나와요, 운현궁하고 우리 집에. 그래서 어

    렸을 때 생각이 나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웃음) ‘밤새 안녕히 주무셨느냐’ [인사를]

    이제 그렇게 정감이라는 사람이 정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그러고 나와서, 그런 분위기에서 우

    리 큰어머니는 굉장히 그런 것에 타파적인…… (웃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19) 우

    리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아주 굉장히 현대 감각을 가지시고 그 외모에서부터 그…… 모든 것

    을 아주 구식의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안 그러신 걸로 전해 들었어요.

    최: 혹시 성함 기억하시나요?

    18

    19) 1938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충정공의 여식인 이해선 선생의 부인은 8월3일 새벽 두 시에 자택에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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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우리 큰어머니, 모르겠네요. (웃음)

    최: 네.

    남: 민……

    최: 소생은 있었습니까? 이해선 선생님하고.

    남: 아, 그럼요. 우리 오빠. (손으로 이길주 선생을 가리키며) 얘의 큰형님. 아까 말했죠. 나이 차가.

    우리 오빠가……

    최: 이해영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남: 아니, 그는 [이해선 선생의] 동생이시죠. {최: 예.} 우리 큰아버지 막내 동생. 형제 분을 우리 집

    안에서는 둘째는 둘째 아버지, 셋째는 셋째 아버지, 넷째는 넷째 아버지 그랬는데. 넷째 아버지

    만 우리 큰아버지의 형제로 [질문지에] 쓰셨는데, 아니에요. 6남매였어요, 우리 큰아버지의 형

    제 분이. 근데 고모 한 분은 내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시고.20) 그러

    니까 아까 말한 대로 ‘해’ 자 ‘명’ 자 [그분은] 운현궁으로 [양자로]가시고. 우리 아버지 셋째

    ‘해’ 자 ‘상’ 자, 그 다음에 넷째가 ‘해’ 자 ‘영’ 자. 문리대 교수셨던 분.21)

    최: 서울 문리대 교수셨나요?

    남: 네. 문리대 학장도 하셨어요. {최: 아……} 사회학 교수였어요.

    최: 사회학과 교수셨고요.

    남: 예.

    최: 1920년입니다. 그때가 다이쇼(大正) 15년인데요. 1920년.22)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서임급사령(敍任及辭令), 그러니까 인사에 관련된, 2월 1일자에 의하면 이해선 선생님이 “종5

    위(從五位)에 서임되었다.” 이렇게 나와있거든요.23) 그 종5위가 어떤 지위였고, 어떤 직책을 맡

    으신 건가요?

    남: 글쎄. {최: 혹시} (이길주 선생을 향해) 그 선원전(璿源殿)24)에서 일하신 걸 가지고 그러지 않았을

    까?

    최: 혹시 이왕직25) 인가요? 선원전인가요?

    남: 글쎄 선원전. {최: 선원전인가요?} 그…… 선원전이 이왕직 안에 있거든요.

    최: 이왕직 내에 선원전이 있겠죠.

    남: 네. 선원전. 네. 그 직함이 아닐까요? 모르겠네요, 저도.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며) 그렇지 않겠

    니?

    최: 그러니까 ‘이왕직의 직책이었다’라고 보면 될까요?

    남: 네. 그렇죠.

    최: 이해선 선생님이 회화를 하시게 된 계기, 그리고 유학 가시게 된 동기 그런 것 혹시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 그런 거, 아니 전혀 모르죠.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제 어릴 적 기억으로는 우리 집안 굉장히 완고했어요. 큰아버지도. 굉-장히

    19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20) “이달용 씨(후작) 차녀 우영(又英) 양28일 오전 세 시 반 자택에서 요절”, 『매일신보』, 1938년 1월 30일.

    21) 이해영(李海英, 1925~1979). 이달용의4남으로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64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부설로 인구연구소를 설립하여 인구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22) 大正 15년은 1926년이다. 면담자가착각했다.

    23) 다이쇼 15년 4월 7일자 『조선총독부관보』제4087호 「서임급사령」에 따르면, 다이쇼15년 2월 1일부로 이해선은 종5위(從五位)에 서임되었다.

    24) 창덕궁(昌德宮) 내에 위치해 있으며선왕들의 어진을 모셔두는 곳이었다. 어진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25) 이왕직(李王職).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함께 설치한 기구이다. 이왕직은 기존의 대한제국 황실업무를 전담하던 궁내부를 형식적으로 계승한 기구로 일본 궁내성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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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고하시고.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예술을 하셨는가가 참, 지금 나이 들어서 생각해도 아주 정

    말 신비스러울 정도예요. 그런데 맨 처음에는 그림을 하셨죠. {최: 네} 그림을 그리셨다가 이제

    사진으로 바꾸신 동기는 직접 말씀을 들었는데, 큰아버지께서 그림을 옛날에 그리신 것 하나,

    하나를 봤는데, 이렇게 여인 나체 뒷모습인데. (손짓을 하며) 그게 꼭 르느와르(Auguste

    Renoir, 1841~1919) 작품 같았어요, 제가 보기에. 난 잘 모르지만. 그림과 사진은 모르지만.

    “아, 이렇게 큰아버지 그림이 좋고 잘 그리셨는데 왜 사진으로 바꾸셨느냐?”고 그랬더니, 큰아

    버지께서 그림으로 그리면 (손으로 그리는 시늉을 하며) 똑같이 된다 하더라도 그게 똑같지가

    않다는 거죠, ‘그림은 내가 대상을 놓고 그려도, 나는 똑같이 그려도 그림은 절대로 똑같을 수

    가 없다’는 거죠. 근데 사진은 그것을 딱 (손으로 허공을 찍으며) 찍으면 그것 그대로 나오니까,

    사진은. 그것 그대로 나오는 거기에 매력을 느끼셨대요. 그림은 암만 똑같이 그리려 해도 똑-

    같이는 안 되니까. 아주 똑같이 안 되니까. 그런데 사진은 “내가 딱 찍으면 그게 그대로 나오니

    까.”

    최: 저희들이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춘곡 고희동26) 선생한테요. “서화협회27)의 고희동 선생한테서 1

    년 사사(師事)를 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28)

    남: 그거 저는 몰라요.

    최: 혹시 그 얘기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남: 모르죠. 그것은.

    최: 혹시 집안의 반대에 관한 일화, 그런 얘기는?

    남: 음. 할아버지께선 물론 반대를 하셨겠죠. 큰아들[이고] 작은아들도 (웃으며) 아니고. {최: 그렇

    죠. 장남, 장자가.} 큰아들이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에 아주 옛날엔 그게 생명 아니겠

    20

    26)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191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 선과(選科)에 입학하여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1915년 귀국하여 미술 교육활동을 전개하였고 1918년에 서화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27) 서화협회(書畵協會). 1918년에 고희동이 주축이 되어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등과 함께 창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단체이다.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을 시작으로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될 때까지 15회의 전시회를 가졌다.

    28)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언(4):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통권260호, 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2002년 3월호, p. 42.

    좌) 이해선, , 1928, 목판에 유채,44×3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 야외에서 작업 중인 이해선, 연도미상,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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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요? 그래서 재산도 다 큰아들이 물려받고. 그 제사 지내고 그 손님을 접대하고, 그것 때문에

    장자가 다 물려받고 그러던 시절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얼마나 반대를 하셨겠어요?

    그렇지만 제 어린 기억으로는 그 반대를 하셔서 할아버지하고 무슨 큰 분쟁이 일어나 큰 소리,

    그런 것은 들어본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 드렸듯이, 우리 이씨 성격이 저도 얘도 모

    두 그 물려받은 칼이기 때문에 한번 딱 정하면 그걸로 입다물지 왈가왈부, 어쩌고저쩌고 그렇

    질 않아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딱 마음 정하시고, 그리고 일본으로 간 다음에는…… (웃음)

    반대를 굉장히 하셨겠죠, 맨 처음엔. 저는 모르지만 어려서.

    최: 동경미술학교29) 그러니까 [속칭] 우에노(上野), 지금은 예술대학이죠. 그쪽을 유학하신 것으로

    돼 있어요. 정확히 가신 해[는 언제인가요]?

    남: 그건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고) 해를. 그건 저는 모르죠.

    길: 해는 몰라요. {최: 예.} 그것은 모르는데. 그 90 몇 년 도인가, 동경미대에서 편지가 왔어요, 집

    으로. 왜냐하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 집에서 계속 살고 있기 때문

    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안국동으로 편지가 동경미대에서 왔는데. 그때 당시엔 내가 일본어를

    못할 땐데. 얼추 보니까 그 동경미대 졸업생들의 소식들을 알고 싶어서 혹시라도 그 주소에 그

    대로 살고 있는지, 아마 보낸 것 같아요. 근데 그때가 [제] 입사 초기인가? 그때 좌우간 그래 가

    지고 ‘이걸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뒀는데 분실을 한 거예요. 제가 이것을.

    최: 입사 초기라는 게 몇 년도입니까?

    길: 제가 회사를 1983년에 {최: 아……} 처음 들어갔는데.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선가, 그 편지가 온

    거예요.

    남: 큰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이죠.

    길: 얼마 지나서가 아니고 좀 더 지나선가 보구나. 어머니도 아마 돌아가신 이후 같으면, 그러면 90

    년도 조금 넘어서였을 것 같은데. {최: 네.} 그렇게 연락이 와서 ‘아 그러면 나래도 한번 회신을

    넣던가 아님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회사 바쁘고 그러니까 잠깐 잊어먹

    고 있었는데, 편지 자체를 분실을 했어요. 그래서 ‘기회가 닿아서 이제 한번 일본 갈 기회가 있

    으면 동경미대를 가서 한번 흔적을 찾아봐야 되겠다’라고 이제 생각은 그렇게 먹고 있었는데,

    아직 그 실행은 못했고. 요즘 뭐 인터넷이 워낙 발달되어 있으니까 메일을 넣든 뭐 할 수 있는

    방법도 있겠는데 좌우간 그것은 아직 숙제로 남겨 놓은 부분이에요.

    최: 동경미대가 아니라 우에노예술대학 아닙니까?

    남: 글쎄. 나도 우리 언니도 우에노로. 언니도 우에노라고 했어요.

    길: 우에노. 그때 편지가 오기로는 동경미대로 왔거든요.

    최: 동경예술대학이죠. {길: 예술대학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대가 아니라 동경예술대학입니다.

    길: 그런 거 같다.

    최: 예. 예술대학. 옛날에는 동경미술학교. 우에노미술학교였는데……

    길: 동경미술학교.

    21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29) 현 동경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 미술학부의 전신. 1887년 회화, 조각, 도안, 건축의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미술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49년 동경음악학교와 합병해 현재에 이른다. 동경미술학교 초기 입학은 본과(本科)와 선과(選科)로 나뉘는데 선과는 본과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선별조치였으며 실기 위주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입학시험이 강화되었고 각 과마다 선과의 정원을 정해 선과생을 선발했다. 조선과 대만지원학생들은 1924년부터 시행된 ‘외국학생특별입학규정세칙’에 따라 일본인 입학생 상당의 시험을 통과하는 자에 한해 선과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외국인 선과생은 특별학생(特別學生)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해선 선생은 1925년 특별학생으로 입학했다. 고희동, 김인승, 이마동, 오지호 등 한국 근대미술 화단을 이끈대표적 인물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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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지금은 예술대학으로 해서 음대도 있다 라고 저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 네, 그렇죠. 우에노 음대가 있죠. 언니도 우에노라고 했어.

    길: 그럼, 그게 맞겠죠. 예.

    최: 가와바타,천단화( )[라고] 한문으로는 그렇게 쓰는 모양인데, ‘가와바타학교( )30)

    [에서] 우에노미술학교, 동경미술학교 들어가시기 전에 1년 수학했다. — 그러니까 일종의 대학

    준비학원 같은데 — 거기도 다니셨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남: 모르죠.} 전혀 모르시고요?

    길: 그때 당시. 그러니까 그 옛날 얘기를 많이 듣지를 못했고, 또 그런 것을 알고 이렇게 하기에는

    제 자신이 (손짓을 하며) 나이가 워낙 어렸었고요. {최: 그렇죠.} 이제 그런데, 간혹 가다 한 마

    디씩 흘리신 그런 내용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 중의 하나가, 그 아까 성장과정에서 한 얘기라든

    가, 뭐 그런 부분에 계속 이어지는 부분인데. 제가 느끼기에도 ‘참 고집이 대단하셨겠다’라고

    느낀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뭐냐 하면, 이분이 처음 일본을 가셔서, 아마도 뭐 어디 섬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으셨었나 봐요. 근데 농담 비슷하게 그때 얘기 하셨었는데. 그날이 막 풍랑이

    쳐가지고 파도가 (손짓하며) 그냥 막 넘실대는 그런 날씨인데, 이 양반이 그 항구를 가서 선장

    에게 배를 하나 잡아가지고 ‘나를 어디 섬에 데려다 달라’고. 그래서 (웃으며) “선장이 너 그러

    다가 죽을 수도 있다. 이 날씨에 어떻게 거기에 가려고 그러느냐?”[하는데] 부득부득 고집을 부

    려가지고 그 선장에게 돈을 주고 거길 갔다는 거예요. 도착을 해가지고, 그런데 배를 평생 안

    타본 사람이 그 험한 날씨에 배를 탔으니 어떻게 됐겠[어요?] 뱃멀미하고 아주 그냥 힘들었겠

    죠. 그래서 나중에 그 섬에 도착해 가지고 선장이 그 뭍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기 시체 하나 있

    으니까 데리고 나가라”고. 완전히 널브러져 가지고. (양팔을 벌리고 뒤로 제치는 시늉을 하며)

    그러니까 그럴 정도로 자기 고집을 세워서 그렇게 실행할 정도니. ‘아, 아버님 젊으셨을 때는

    참 고집이 대단하셨겠다’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에 기초해서 생각을 해보면, 음…… 이분이 언

    제부터 본인이 뭐 미술이라든가, 예술 계통에 ‘내가 재질이 있다’라고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뭐……

    최: 춘곡 고희동 선생님한테 {이길주: 고희동 선생님한테} 사사를 한 것으로, 예.

    길: (손짓을 하며) 사사를 받기 전에 무슨 생각으로 또 그것을 사사를 받으셨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본인 스스로 그 자질을 깨달아서 그렇게 하셨든, 아니면 그때 상황 자체가 뭐 일제시대이다 보

    니, 그런 상황적인 논리에 의해서 본인의 어떤 반발심으로…… 뭐 말은 왕가지만 사실 왕가로

    서 할 수 있는 게 뭐 있었겠어요? 아무것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것 때문에라도 그런 계

    통으로 밟아나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편으로는.

    최: 저번에 90년대 받으셨다는, 혹은 1980년대요. 받으셨다는 그 편지가 졸업생에 관한 자료정리를

    위한 그런……

    길: 자료정리라기 보다도 제가 기억하기에는 좌우간 졸업생들한테 연락을 보내니……

    남: ‘근황을 알려라’ 그거죠.

    길: ‘현재 그 주소에 살고 있든가, 아니면 뭐 근황을 알려다오’라는 (손을 흔들며) 그런 식의 얘기였

    22

    30) 일본의 사립 미술학교로 1909년, 가와바타 교쿠쇼(川端玉章)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인승, 김경승 형제, 오지호 등이 동경미술학교 입학 전, 이곳에서 데생 등 기초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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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던 걸로 기억을 해요.

    최: 왜냐하면 어느 책자를 보면 ‘수학을 했다’ 혹은 어떤 데는 ‘졸업을 했다’ 이게 [확실하질 않아

    요.]

    길: 그것도 {최: 예.} 그 학교에다 물어보면.

    최: 물어봐야 정확하게,

    길: 예, 아마 뭔가 확인이 되겠죠.31)

    최: 예. 그때 어쨌든 동경유학은 정말로,

    길: 일반인으로서는,

    최: 예.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유학 아닙니까? 아주 정말로 돈 많은 자제 분들이나 가능

    했던 일인데. 그러면 이달용 부친께서 {남: 네.} 그냥 흔쾌히 경제적인 지원[을] 하시지는 않으

    셨겠지만 {남: 흔쾌히는 아니셨죠. 네. 그러니까,} 장자가 {남: 그렇죠.} 어쨌든 생활하는 데는…

    남: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할아버지께서는] 굉장히 엄격하고 단호하신 반면에 그만큼 자

    애로우셨어요. {최: 네.} 굉장히 자애로우셨어요. 그래서 옛날 지주셨는데 시골에도 집, 선산이

    있고 그랬는데, 농민들한테도 아주 자애를 베푸셔서 우리가 6·25동란 때, 우리 식구들이 우리

    [시골] 집에 못 있고, 방 하나 세를 얻어서 6·25동란 때, 우리가 모두 어릴 때, 초등학교 6학년

    이었어요, 제가. [피난] 가 있을 적에 [동네] 주민들이, 옛날 우리 할아버지 소작인들이 우릴 먹

    여 살렸어요. 이렇게 머리에 이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인민군들이 총부리를 대고 (손으로

    흉내 내며) “어디를 가냐?” 그러면 여자들이 쭉 늘어서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우리 저기

    부녀회에 간다.”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이걸 이고 우리 집 마당에 탁탁 뭘 던지고 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을 우리가 먹고 살았어요, 6·25 때. 그 시골에 가서, 서울의 우리 식구들이.

    그럴 정도로 자애로우시고 아주 극에서 극이셨기 때문에, 반대는 반대고, 또 자식이 외국 가서

    굶어 죽으면 안 되니까, 서포트하신 거고. 그게 아닌가 싶어요.

    최: 그러면 선산이나 토지가 대개 남양주, 그쪽에 다……

    남: 네. 남양주, 덕소.

    최: 덕소. 지금의 덕소 그 지역인가요?

    남: 네. 덕소죠.

    최: 네. 그때 민 충정공 여식, 사모님과 같이 가셨구요?

    남: 아니, 아니요. 우리 큰어머니는, 먼저 큰어머니는 내가 낳기[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폐결

    핵으로.

    최: 아니, 유학 가실 때요?

    남: 유학? 아, 우리 큰아버지?

    최: 예. 이해선 선생님이 동경 가실 때. {남: 유학가실 때 혼자 가셨는데} 혼자 가셨는데,

    남: 가셨는데 할아버지께서 “내외가 같이 있어야 된다.” 하고 며느님을 보내셨어요. {최: 네.} (웃으

    23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31) 본 연구소에서 동경예술대학측에 문의한 결과, 이해선은 1924년 4월 5일 동경미술하교 서양화과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지도교수 와다 에이사쿠(和田英作)의지도하에 1930년 3월 23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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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 반대는 반대고. 그만큼 자애로우셨어요. [그래서] 며느님을 보내셨어요, 동경으로. 근데 큰

    아버지께서 “나 공부하는데 헷갈린다.” 그래서 큰어머니는 다시 쫓겨오셨어요.

    최: 다시 오시고. 네. 저희들이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1931년 귀국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까 일본 유학을 마치시고, 우에노미술학교를 마치시고 1931년 귀국하신 다음에, 인제 이왕직

    관련 부서, {남: 네.} 특히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근무하신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남: 네.} 그 다음에는 이왕가 덕수궁박물관에서 근무하신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왕가박물관은

    창덕궁에 있었답니다.32)

    남: 네, 선원전.

    최: 예. 선원전. 거기에 위패들과 {남: 네.} 그 뭐라고 하죠?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에서요.

    남: 어려서 기억으로는 밤에 거기에 도둑이 들어서 큰아버지께서 “어제 밤에 도둑이 들어서 거기 가

    밤을 샜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던] 생각이 나요.

    최: 그러니까 선원전에서 근무를 하셨구요, 이왕가박물관의.

    남: 선원전. 네.

    최: 1934년에는 이왕가 덕수궁미술관이구요?

    남: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최: 그것은 모르시고. 근데 운영위원으로 재직하셨는데, 자료들을 보면 그때 ‘궁궐 사진을 촬영하셨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유학을 1931년에 갔다 오시고 이제 이왕가박물

    관에서 근무하시고, 또 ‘궁궐 사진을 찍었다’라고 해서 이 시기가 서양화에서, 양화에서 {남:

    네.} 사진으로 전향한 시기라고 저에게는 보여지거든요. {남: 네.} 그것에 {남: 모르죠.} 대해서

    자세한 얘기는……

    남: 언제인지, 네. 시기적으로는 전혀 모르죠.

    최: 언제부터 사진기를 들고 다니셨다, {남: 그것도} 사진을 찍으셨다, 그것도 정확한 얘기는 {남: 모

    르죠.} 모르시죠?

    남: 네.

    길: 그러니까, 이 시발점을 알려고 그러면 아마도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처음에 대한사진예

    술가협회33)니, 뭐 이런 거 이전에, 이분들이 동호회 비슷하게 모이셨던 게 뭐 백양사우회34)?

    최: 네. 1936년에 {길: 예.}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35)가 생기고. {길: 사진구락부} 1939년에 백양사

    우회가 {길: 예.} 결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1931년에 귀국하시고, 이왕가박

    물관에서 일하시면서 사진을 이제[찍으신 듯해요.] 제가 보기에는 궁궐 사진은 이 중에 하나겠

    죠. 사실. 왕가에 대한 어떤 책임의식 그리고 ‘왕가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라는 어떤 그런

    게 분명히 모티베이션(motivation)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이때 사진을 찍으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바로 이게 사진에 취미[를 갖는……]

    길: 동기부여가 {최: 예.} 여기서부터 됐었을 수도 있겠네요.

    최: 예. 저는 [시기를] 그렇게 잡고 있거든요.

    24

    32) 1908년 순종이 창경궁 내 세운 조선최초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 1910년국권 피탈 후 이왕가박물관으로 명칭이변경되었다. 1933년 덕수궁 석조전을 개조하여 덕수궁미술관이 세워졌고, 1938년이왕가박물관이 석조전 옆에 신축된 건물로 이전하면서 덕수궁미술관과 이왕가박물관이 통합되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33)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 1945년 이해선, 김정래, 박필호 등에 의해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조직됐으며, 1947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1957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박영진을 초대회장으로 이해선, 박필호, 현일영 등의 회원이 활동했으며, 1930년대 활동한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와 백양사우회 회원들이 참여한사진단체이다.

    34) 백양사우회(白羊寫友會).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에서 이규환, 이일구 등7~8명이 따로 떨어져 나와 1939년 결성한 아마추어 사진단체로 이해선이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에 해산됐다.

    35)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가 정확한 단체명이다. 1937년 박영진, 이해선,현일영, 이성윤, 임병기, 이규완 등이 주축이 되어 오자와(大澤) 상회를 거점으로 결성한 조선인 아마추어 사진단체이다.1943년 일제의 단체해산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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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근데 동경에서 사진예술을 공부하시지 않으셨어요?

    최: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1930년대는 사진이 아직……

    길: 사진 문물을 접하셨을 수는 있겠죠.

    최: 접하셨겠지만, 사진교육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남: 아……} 1930년대에 전통적인 미술학교에

    서 사진교육을 행할 리는 없거든요. 사진교육이 대학교로 들어온 것은 서구에서조차도 1960년

    대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1930년대 미술대학에서 사진교육을 할 리는 없습니다.36) 제가 보

    기에는 이제 이왕가박물관에서 근무하시면서 또 박물관직이라는 게 기록도 해야 되고, 이런 필

    요성에 의해서, 취미로 하고 계시던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다가, 1936년에 경성아마추어카메라

    구락부 그런 게 결성이 되니까 본격적으로 사진활동을 하신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쪽에 대해서는 정확히 유족 분들도 아시는 게 {남: 뭐 없죠.} 없으시군요.

    또 이 얘기도 자꾸 반복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물어보겠는데요. “『아사히사진연감』에 수록할 사

    진에 응모하여 입상하셨다.” 이렇게 얘기하시는데37) 그것도 {남: 아니……} 들어보신 적이 없나

    요?

    남: 전 모르죠.

    길: 그것은 언뜻 들어본 기억은 있는데 정확한 내용은 제가 잘 모르겠네요.

    최: 네. 전혀 들어보신 적 없고요? 혹시 다른 데, 그러니까 조선 내에 사진공모전이 인제 1930년대

    후반서부터 일반화되거든요. {길: 음……} 국내에서도. 그리고 당연히 일본 같은 경우에는 1920

    년대 말에서부터. 『아사히신문』에서 사진공모전이 인제 대규모로 행해지거든요. ‘공모전에 입

    상하셨다’ 뭐 그런 얘기, 들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혹시 상장이라든지 그런 자료를 갖고 계

    시지는 않으시나요?

    길: 그런 자료는 없어요.

    최: 전혀 없으시고요.

    길: 네.

    최: 『아사히사진연감』도 혹시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길: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쎄요. 『아사히사진연감』?

    최: 아마 저희들이 지금 추정하기에는 194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근데 그것도 선생님이 ‘30년대

    말이다, 40년대다’ 이것도 좀 왔다 갔다 하세요.38) 그래서……

    남: 제 기억으로는 일본은 모르겠고. 무슨 그게 우리나라 잡지가 아니고. 아, 그 잡지 이름을 잊어버

    렸어요.

    최: 『아사히사진연감』입니다. 아사히 그쪽에서……

    남: 아사히 일본.

    최: 조일(朝日)이죠.

    남: 일본이 아니고 무슨 영어로 된 유명한 잡지였는데 잊어버렸어요. 거기에 하나, 큰아버지 작품이

    실렸던 생각이 나요.

    25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36) 본 연구소에서 당시 동경미술학교의사진과 설치에 관해 동경예술대학측에 직접 확인해 본 바, 동경미술학교에 임시사진과(臨時寫眞科)가 1915년 설치되었고(『동경예술대학백년사 동경미술학교편』vol.2, 1992, pp. 655~664) 1923년 사진과(寫眞科)로 이름을 바꾸었다.(『동경예술대학백년사 동경미술학교편』vol.3, 1997,p. 137) 같은 해 5월 26일 선생들과 장비들이 모두 동경고등공예학교의 인쇄공예과(印刷工藝科)로 이관되었고(위의 책(1992), pp. 656~657; 위의 책(1997),pp. 124~126) 1926년 5월 19일 폐과(위의 책(1997), pp. 124~126)되기 전까지불규칙적으로 개설되어 존속해왔다 한다.하지만 1924년에서 1932년 사이 서양화과 교과목에 사진관련 과목명은 찾을 수없고 1925년 입학한 이해선 선생이 사진과를 수강 할 가능성은 있으나 이를 확신할 수는 없다. 안장헌 선생은 이해선 선생이 동경미술학교 재학 당시 사진을 접했다 술회했는데 위 사실에 기반한다면 학교 내의 과목 수강 혹은 사진을 기반으로그림을 그리던 것에서 자연스럽게 접했을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보다 정확한 정보는 당시 동경미술학교의학과 편성과 커리큘럼을 확인해야 분명하겠다. 당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교과목에 대해서는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학』, 제6호, 2005, pp. 51~64 참조; 안장헌 선생의 증언은 본 고 제2차 구술면담을 참조.

    37)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언(4):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2년 3월호(통권 260호), p. 49. 이 글은 1973년 2월, 최인진이 이해선 선생 자택에서 대담한 육성 녹음을 정리한 것이다.

    38) 위의 글에서 이해선 선생은 1941년『아사히사진연감』에 가수록되어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최인진의 『한국사진사 1631-1945』(눈빛, 2000)에서는 1939년에 수록되었다고 기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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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아, 그러세요? 직접 보셨던 기억이 있으세요?

    남: 그렇죠. 그래서 “어휴, 큰아버지 참 대단하시다.” 그러니까 내가 그것을 이렇게 기억할 정도니

    까, 내가 어느 정도 컸을 테니까. 근년이겠죠. 그래서 그게 국제적인 어떤, 아사히 그런 일본이

    아니고, 유명한 잡지였는데……

    길: 아버님이 평생을 보셨던 잡지가 있어요.

    최: 예. 그 잡지가?

    길: 『내셔널지오그래픽』하고 {최: 예.} 그 다음에 『아사히사진연감』?

    최: 아사히……

    남: 『내셔널지오그래픽』인가? 그럼?

    최: 그쪽에는 공모전이 {길: 일본.} 별로 없습니다.

    길: 일본 사진잡지인데. 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걸 평생을 보셨거든요. 아이고, 사진잡지

    이름이 뭐지? 평생을 [보셨어요.] 지금 잡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일본 사진잡지를 평생

    을 보셨어요. 좌우간, 꾸준하게……

    최: 그 잡지를 어떻게 보관하고 계신가요? 선생님이 보셨던 잡지를?

    길: 그 잡지는 없어요. 그런 일반 사진잡지들은. 뭐 아버님 자료가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보셨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보관하고 있지는 않죠.

    남: 그래서 제가 본 그 잡지에 실린 큰아버지 그거는 왜,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고) 내가 갖고 있는

    바퀴 있잖니? (손으로 원을 그리며)

    길: 네.

    남: 바퀴.

    26

    이해선, 연도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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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길: 예예.

    남: 바퀴 사진이었던 거 같아요. 바퀴 아시죠? 구루마(荷車), 바퀴.

    최: 미국 사진잡지에 실렸던 그거에는, 네.

    남: 네. 영어, 『내셔널지오그래픽』인지 뭔지…… 그 사진이 큰아버지의 대표 [사진], 큰아버지께서

    굉장히 아끼시는 사진이어서 내가 4년을 졸라서 그때 그 사진을 (웃음) 큰아버지께 “저 주세

    요.” 그래도 안 주시는 것을, 내가 막 4년을 졸라서 갖다 놨어요, 그것을. 바퀴에요, 그게.

    최: 수레바퀴를 이렇게 찍으신 건가요?

    남: 그렇죠. 네. 바퀴. 구루마를 우리나라 말로. (손짓으로 묘사하며) 바퀴가 이렇게 있는. 그게 거기

    에 실렸던 것 같아요.

    최: 지금도 보관하고 계신가요, 그 사진을?

    남: 그 사진은 가지고 있죠. {최: 아, 예.} 사진은 갖고 있지만 그 잡지 이름 생각이. “아! 큰아버지 대

    단하시다.”

    최: 『US카메라』 아닌가요?

    남: 아니요. 어휴,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최: 이쪽 부분도 너무 오래된 얘기라…… 1934년까지 《서화협회전》. 그러니까 춘곡 고희동 선생이

    만드신 거죠, 창립자이시죠, 서화협회. 그리고 ‘사사까지 했다’라고 하니까요. 거기에 회원이

    되셨어요. 그래서 《서화협회전》이라고 1년마다 한 번씩 있는데, ‘4회 서양화를 출품했다’는 그

    런 진술이 있습니다. 발언이 있는데, 혹시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던, 그때는 그림이겠죠? 그림,

    보신 적이나 혹은 지금 원본을 소장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남: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며) 큰아버지 그림……

    길: 그게 몇 년도 [인가요]?

    최: 1934년까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제가 보기에는,

    남: 그림을 그리셨다는

    최: 예. 그림을 그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분명히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서양화에서 사진으로 전향

    을 하신 걸로 보여요. 그래서 《서화협회전》에, 협회전이 매년 연례 행사였거든요. 연례 전시행

    사였는데, 그때 ‘네 번을 출품하셨다’라는 진술이 있습니다.39)

    남: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고) 그거 아니겠니? 그 나체. 그거 누가 갖고 있니?

    길: 그것은 형님 {남: 가지고 갔어?} 집에 있고 우리 집에 있는 것은 정물화, 유화. 둘 다 유화인데.

    그리고 누군가가 또 아버님 유화 작품을 가지고 계시다고 그러더라고요.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최: 아, 친인척이 아니신데요?

    길: 예예. 누가 가지고 있다고 그때 그러셨고. 그것 외에는 제가 아버님 작품, 그 미술 작품 얘기를

    들어보지를 못했거든요.

    최: 아, 그 그림에 어떤 제작 연도. 시그너처(signature), 사인이 있거나 그런 거?

    길: 그것은 자세히 보지 않았어요.39) “미술협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작품도3~4회 출품했다.” 최인진, 위의 글,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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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네. 확인해보시지는 않았고요. {길: 예예.} 혹시 《조선미술전람회》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국전

    이죠. ‘《선전(鮮展》’이라고 그랬죠. {남: 네. 《선전》} 거기에도 출품하셨나요?

    남: 그것은 모르죠, 우리는.

    길: 그 이름은 제가 들어본 기억은 나는데.

    최: 왜냐하면 그때 우에노미술학교의 선후배이신 분들이죠. 그분들이 정말 지금 한국 미술계의 대

    가, 원로들이 되신 분들이죠, 다. 뭐 김인승(金仁承, 1910~2001), 김경승(金景承, 1915~1992),

    후학이실 거고요. 고희동 선생님한테도 수학하셨고. {길: 아마도 그때.} 이마동(李馬銅,

    1906~1980) 선생도 거기 졸업하셨고. 한국 미술역사에 정말 초창기의 대가들이신데.

    길: 그 시절에 사진을 하셨으면 그 《선전》이라고 하는 데도……

    최: 《선전》에는 사진부가 없었죠.

    남: 사진이 아니라 그림.

    길: 아, 그림이었나? {최: 예.} 그 얘기는 분명히 들어본 기억은 나는데.

    최: 글쎄, 예. 선후배 분들은 《선전》에 입상하시고 그랬거든요. 다 출품하시고 그래서. 그런데 전혀

    흔적이 없으셔 갖고……

    길: 안 하셨을 거예요, 그러면.40)

    최: 그러면 사진으로 전향하신 다음에는 거의 이제……

    길: 사진으로 이렇게 바꾸신 뒤로는 아마 유화나 뭐 일반 미술 저쪽으로는 안 하셨던 것 같아요.

    최: 그러면 대체적으로 보면 지금 가지고, 소장하고 계시는 그림이 1930대 초반, 그런 쪽이라고…

    길: 초반 내지는 {최: 예.} 그 이전이라든가 좌우간……

    최: 이전이라고 봐야 되겠네요. 그러면 보존 상태는 좋습니까?

    28

    이해선의 정물화, 연도미상, 유화, 유족소장좌측 하단에 이해선의 영문 이니셜 'LH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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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 예.

    최: 예. 그럼 선생님의 호가 백오(白烏). 사실 어떻게 보면 모순이죠. 까마귀인데 백오라고 해놨는

    데. 이러한 아호(雅號). 아호신가요? 이게? 본인이 스스로?

    남: 아호는 아니죠. 아호는 또 딴 게, 우리 집안에는 그 어른들의 호가 여러 게 있어요. 아호도 있고

    {최: 예예.} 뭐도 있고 뭐도 있고 그런데. 그 제가 듣기[에], 백오는 블랙앤화이트(black and

    white). {최: 예예.} 그렇게 들었어요.

    최: 아, 그렇게 들으셨나요? 그러니까 흑백사진.

    남: 네. 흑백.

    최: 흑백사진에 대한 은유.

    남: 예. 큰아버지께 제가 직접 들었는데, 그 칼라,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그래…… {최: 칼라사진이

    요?} “칼라사진은,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최: 본인이 그렇게 직접 {남: 예.} 말씀하셨어요?

    남: 흑백. 그래서 ‘백오’도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블랙앤화이트로 제가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 “흑

    백이 정말 희고 까만 거가 정-말 예술의 세계지, 색채가 있는 사진은 그것은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셨어요.

    최: 대충 선생님이 언제, 이남주 선생님, 한 언제 때 {남: 그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세

    요?

    남: 그게 그러니까 제가 대학교 때겠죠.

    최: 그러면 그때가 몇 년도?

    남: 그때가 57, 57학번이니까. 대학교 졸업하고는 제가 금방 미국을 갔으니까, 57학번에서 내가 63

    년에 미국을 갔으니까 그 사이의 얘기겠죠. 뭐 중고등학교 때야 큰아버지하고 그런 대화를 할

    29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40) 이해선, , 1926, 유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1925년 5월 12일 『매일신보』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 입선자 명단’에서 확인된 이해선 선생의 이다. 전시작 도록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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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

    최: 이남주 선생님은 그럼 57년에 유학 가셔서

    남: 대학을. 아니 57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62년에 졸업을 하고. 제가 1년 휴학을 했어요. 그리고 63

    년에 미국을 갔어요.

    최: 네. 미국 어느 쪽으로 유학 가셨나요?

    남: 시카고.

    최: 시카고.

    남: 그러니까 그 시절 아니면 미국에서 돌아와서[의] 얘기든가, 그렇겠죠. (웃음)

    최: 그건 정확한 기억이 없으시고?

    남: 네. 정확한 기억이 없어요.

    최: 그러니까 이해선 선생님하고 그래도 교류가 굉장히 잦으셨나요?

    남: 저는, {최: 유학기간을 빼고는. 아,} 저는 굉장히 [교류가 잦았어요.] 큰아버지께서는 사진예술을

    하셔서 그런지 — 우리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큰아버지도 엄격하셨지만 — 엄격하

    셨지만 조카딸들한테는 너그러우셨어요. (웃음) 그리고 유머가 굉장히 많으시고. 우리 아버지

    형제 분들이 굉장히 칼칼하시면서도 당신은 웃지 않고 유머가 많으셨어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 귀족들이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유머가 많다.” 그 소리 (웃으며)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았는

    데, 남들이 하는 얘기죠. 그래서 그런지 큰아버지는 특별히 유머가 많으시고 저를 참 예뻐하셨

    어요.

    최: 아버님께서는 직업이?

    남: 우리 아버지는 그냥 회사를 다니시고.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아주 옛날에, 그 당시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아주 유명한 무슨 농장이 있었대요.

    30

    이해선, 연도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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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조선 내에요? 한국 내에요?

    남: 네. (손짓하며) 그 농장에서 아버지를 교육시키셔서 덕소의 큰 땅을, 그 선산 뒤의 마을 전체를

    우리 아버지 것으로 해주시고. “니가 여기서 농사를 짓고.” 그 농사가 뭐 밭농사 그런 게 아니

    고, 포도, 그게 포도 과수원에 가셔서 그랬던 사진도 있었어요. 근데 우리 집에 과수원도 있었

    고, 그래서 그걸 하라고 그러셨는데. 그야말로 농사도 애기 때부터 해야지, 그게 뭐 몸에 배지

    않으면 되겠어요? 그래서 그냥 회사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특별한 예술 그런 것은 안 하셨

    어요.

    최: 지주, 그쪽이 {남: 네.} 주로 수입원이셨겠군요.

    남: 네. 그렇죠. 네, 옛날에는 그랬죠.

    최: 그러면 생활은 그때 이해선 선생님이나 아버님 쪽이나 {남: 네.} 형제 분들, 그러니까 이해선 선

    생님 형제 분들 다 윤택하셨나요?

    남: 윤택하지는 않았어요. 6·25동란 이후에는 {최: 네.} 재산을 많이, 어수룩하니까 전부 사기 당하

    고 그래서 그냥 가난하게 살았지만 뭐 굶어 죽을 정도의 (웃음) 가난은 아니고.

    최: 그래도 이제 땅에서 나오는 소득이……

    남: 예. 그렇죠. 그냥.

    최: 안정된 소득은 있었고요?

    남: 네네. 그 기본. 기본[적으로는].

    최: 아니, 선생님 유학까지 하셨다니까 그때는 {남: 아니(웃으며)} 미국 유학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

    하기 힘드셨을 땐 데, 쉽지 않았을 땐 데.

    남: 미국 유학은 다 그때는, 우리가 갈 때에는 스칼라십(scholarship)을 못 받으면 여권이 안 나올

    때[예요.]

    최: 여권 자체가 안 나왔죠.

    남: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집에 돈도 없었지만 그때는. 우리가 6·25동란 이후에는

    돈도 없었죠. 아버지께서 다 사기 당하셔서. 있다 해도 못 보내요. 이 국가에서.

    최: 외화반출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남: 네. 그래서 여권이 없으면, 아니 장학금이 없으면 여권이 안 나오던 시절이에요. 그러니까 장학

    금으로 갔죠, 집의 돈으로 간 게 아니라, 장학금.

    (테이프를 교체하며 잠시 휴식 후 녹화재개)

    최: 아호 백오에 대한 [뜻은] 흑백사진[에 대한] 은유인 건 거의 확실한 거 같습니다. [이남주] 선생

    님 말씀도 그렇고요. {남: 글쎄요. 저도 그렇지만 또 모르죠.} [이해선] 선생님께서도 『동아일보』

    에 1957년에 그런 말을 쓰신 적이 있어요. “백(白)은 흰빛이요. 오(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

    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이니 그 뜻이 생활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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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될 것 같으며, 둘째는 백자(白字)는 백의민족의 첫 자를 떼어놓고 오 자는 반포조(反哺鳥)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하였다.”41)

    {남: (고개를 끄덕이며) 음음.} 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런 거 같은데. 저희들이 왜 이

    질문을 하냐 하면 1968년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서 그…… 단체전…… 도록이 나오는데요.42)

    그때는 ‘측백나무 백(柏)’ [자]에다가 ‘둑 오(塢)’ 자를 썼어요.

    남: 그것은 저는 모르겠어요.

    최: 예. 그래서……

    남: 그것은 누가?

    최: 어, 참 이상하다. 본인, 선생님께서도 백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 대한사

    진예술가협회 도록에 한자를 전혀 관련이 없는 ‘측백나무 백’ [자]에다가 ‘둑 오’ 자, ‘둑 오’

    자는 아주 희귀한, 흔하지 않은 ‘오’ 자를 써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됐나 그랬더니, 이건 내가

    볼 적에 전혀, 완전히 잘못된 오식(誤植) 같습니다.

    남: 글쎄요.

    최: 예. 그러면 아까[이해선 선생의]아버님, 이달용 선생님이 이제 사진하는 거에 대해 탐탁치 않으

    셨지만 워낙 딱 부러지는 성격이시라 {남: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냥 그 다음부터는 묵인 형

    태. {남: (고개를 끄덕이며) 네.} 찬성도 반대도 안 하시는 {남: (웃으며) 네.} 네. 그런 얘기 들어

    봤는데. (웃으며) 가족 분들은 어떠셨나요? 그러니까 어르신이 아니라……

    남: 가족? 글쎄요. 저는 우리 집안의 성격이 남하고의 관계도 그렇고,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그러는

    풍토가 아니에요. (웃으며) 우리 집안 풍토가.

    최: 더구나 또 이해선 선생님은 장자셨으니까.

    남: 그러니까 아무도 저거를 달 그런…… 큰아버지께서 사진을 하시는 데 대해서 이유를 달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누가 달겠어요? (웃음)

    최: 장자의 권위도 있었을 거구요.

    남: (웃음) 아니 뭐 권위의식, 그런 걸 떠나서. 우리 집안의 성격이 각자가 각자의 그것을[생활을] 침

    해할, 근본적으로, 그런 성격들이 아니에요. 내가 그것을 몰랐었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보니까

    ‘아, 참 우리 집안[사람들]이 아주 굉장히 똑 부러지는구나’하는 걸 사회생활에서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누가 뭐 큰아버지의 예술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할 그럴 처지가 아니죠. 그냥…… 큰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을 하시는 것에만 그냥 관심이 있지 —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입장이]

    다르[시]지만 — 그 외 분들은 그랬어요. 아무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오빠도 그

    렇고. 큰아버지가 장자이신데, 누가 뭐라 그럴 사람이 없죠. (웃음)

    최: 1939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입니다. 『매일신보』 인사(人事)란에 이러한 기사가 실립니다. ‘이

    해선 씨 이왕직속(李王職屬)’ 그러니까 이왕직에 소속되어 있는 이해선 씨 ‘3일 오전 2시 부내

    (府內) 가회정(嘉會町)’, 그러니까 부내는 경성부내 가회동이라고 해야 되나요? ‘30[번지] 자택

    에서 상배(喪配)’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상배’가 ‘상처(喪妻)했다’라는 얘기니까……

    32

    41) 이해선,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42) 『16회 대한사협전작품집』, 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68;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서처음으로 발행한 연례 회원전 전시도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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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그게 몇 년도요?

    최: 1939년입니다.

    남: 39년에는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그때 안 돌아가셨어요.

    최: 아뇨. 상배, 상처를 했다는 얘기죠.

    남: 아, 네네.

    최: 충정공의 여식.

    남: 그렇죠. 네.

    최: 39년에.

    이: 네. 그 연도는 모르지만, 네, 그래요.

    최: 충정공의 여식 맞죠?

    이: 네 네.

    최: 언제, 어떤 분과 재혼을 하시나요? 이해선 선생님.

    남: 그러니까 (이길주 선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우리 동생 어머니.

    최: 예.

    남: 뭐라고 그럴까. 나이가 많이 큰아버지보다 어리시죠. {최: 네.} 그리고 몇 년도에[시집]오셨는지

    나는 몰라,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며) 네가 아니? 몇 년도에 큰어머니 재혼하셨는지?

    최: 그러니까 충정공 여식분이 1939년에 돌아가시니까.

    남: 그 연도는 전 모르겠어요.

    최: 네. 39년입니다. 저희들이 신문에서……

    남: 제가 39년생이기 때문에. 제가.

    최: 예. 아시는가 해서…… 언제 어떻게?

    남: 재혼하신 연도를 아니? (이길주 선생을 바라보며) 네가? 나는 연도를 모르겠어요.

    길: 결혼 연도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까.

    최: 어머님도 어떻게…… 그, 왕가 그쪽?

    남: 아니, 전혀 아니셨어요.

    최: 아니셨어요.

    남: 네네.

    최: 네네.

    길: 저희 어머니는 일반 여염집이셨고. 그러고 보니까 두 분 결혼기념일을 모르겠네요. (웃음)

    최: 네.

    남: 집안에서 중매를 하고, 양반집 규수하고 중매를, 민 충정공 따님처럼 그렇게 하신 게 아니고, 그

    냥 그 시대만 해도 지금 같지는 않지만, 큰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분하고 [재혼]한 거예요. 친구

    분의 소개로.

    최: 상배하시고……

    33제1차 구술면담: 이해선의 생애와 사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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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네네. 친구분의 소개로. 집안에서 어레인지(arrange)된 그런 결혼이 아니고…… 그러니까 큰아

    버지께서 친구 분의 소개로 만나셔서 큰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분하고 [재혼] 한 거예요.

    최: 그러면 형제 분은 어떻게 되시나요?

    남: 얘 (이길주 선생을 가리키며), 외아들이죠. 그 어머니한테는.

    길: 저 혼자죠.

    최: 아, 예. 그럼……

    길: 제 위로는 이제……

    최: 충정공 여식의 소생들이시구요.

    길: 큰어머니에게서는 이제……

    남: 오빠 하나하고,

    길: 형님하고 누님하고 계셨었고……

    최: 이것도 저희들로서는 좀 약간 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인데 하여간 뭐 확인 차 한번 질문 드

    려보겠습니다. 이해선 선생님이 “작위(爵位) 습작(襲爵)을 거부하셨다.”…… 이달용 선생님이

    후작(侯爵)이셨죠?

    남: 네.

    최: 그러니까 작위가 장자한테 계승이 되게 되어 있는데, 습작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작위를 가지신 분이 사망을 하셔야, 작고를 하셔야 그 작위가 이제 {남: 그렇죠.} 장자

    한테 {남: 그렇죠.} 계승이 되는데. 아까 말씀 드린 대로 1948년에 작고하신단 말이에요, 이달용

    선생님이. {남: 네네.} 그러니까 해방 이후라는 얘기죠.

    남: 그렇죠.

    최: 그런데 어떤 글에는. 이것은 안장헌43) 선생님이 쓰신 겁니다. “선생은 나라 잃은 왕가의 후손으

    로 일가가 그에게 던져준 남작(男爵) 칭호를 거부한다.”44) 이렇게 말하는데, 이게 저희들로서는

    앞뒤가 안 맞는 거죠.

    남: 남작이라는 것도 납득이 안 가는 게. 저…… 우리 완순군 할아버지께서 후작이셔서,

    최: 후작이셨고.

    남: 그걸 그대로 우리 할아버지께 후작으로.

    최: 예. 후작으로 물려받으신 거죠. 후작이면 두 번째 서열인데요.

    남: 그렇죠. 그런데 우리 큰아버지께 물려주신다면 그 3대는 똑같이 후작으로 {최: 후작으로, 예예}

    알고 있어요. 그 전부터 내가 “그게 왜 남작이냐? 백작(伯爵)도 아니고.”

    최: 그런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으셨어요?

    남: 네. 들었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그것을 “내가 지금 이 시대에 그걸 받아 뭐하느냐. 싫다.”

    그러셨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앞뒤가 진짜 저도 안 맞아요. 그게 남작이라는 것도.

    길: 아니, 세습이 되는 작위 같으면 당연히 돌아가신 다음에 후작위로 이렇게 물려지겠지만, 지금

    남작이라는 말씀 나오는 것 들어보면 그게 아니고, 살아 생전에 봉작(封爵)을 하려고 하지 않았

    34

    43) 안장헌(1947~ ).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고려대의 사진서클 호영회를 결성했으며, 이해선 선생에게 사사했다. 1993년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이다. 2006년 《이해선사진문화상》, 2011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봉사활용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석굴암』(1989), 『한국의 세계문화유산』(1996)등 다수가 있다.

    44) 안장헌, 「나의 스승, 백오 이해선: 한국사진의 영원한 빛」,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p.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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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 은 1947년 5월 2일 공표된 일본황실령 제12호 에 의해 폐지된다.

    46) 이에 대한 해명은 본 고 제2차 구술면담에서 안장헌 선생이 행한 진술을 대조할 것.

    겠느냐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 만약에……

    최: 그래서, 예. 48년에야 어쨌든 계승이 되는 것이거든요, 작위가.

    길: 그럼 연도나 이런 것은 아마 안장헌 선생님이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아요. 이미 왜정시대가 끝

    난 시점에 무슨 그게……

    최: 일본황실령도 1947년에 완전히 폐지가 되거든요.45)

    남: 예. 그렇죠. 다 없어졌어요.

    최: 폐지됐는데 이게 좀 아이러니하게……

    길: 그러니까 그 부분은 그분이 뭔가 그 연대하고 이런 것을 착각을 하신 게 아닌가…… (손짓을 하

    며) 그러니까 남작이라는 부분이 그분의 말씀 나오고, 지금 누님도 기억하시는 것 보면 분명히

    그 얘기가 나왔던 것은 같은데, 그렇다면 연도는 안[장헌]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좀 뭔가 착

    각을 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최: 혹시 그 얘기는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구체적으로?

    남: 구체적으로 들어보지는 않았어요. 저는 또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고. 큰아버지께서 “이 시

    대에 내가 그게 뭐가 필요하냐? 쓸데없다.” 그러셨다는……

    최: 얘기를 그냥 전해 들으신 거지요?

    남: 네, 들은 거죠. 전해 들은 거죠.

    최: 직접 들으시거나 {남: 아니죠.} 가족 분들이 얘기하시는 {남: 아니죠.} 그런 얘기를 들어보신 적

    이 없으시고요.

    남: 아니죠. 그것은 아니죠.

    최: 저희들로서도 이게 앞뒤가 맞지가 않아 가지고요. 후작인데 또 남작으로 {남: 글쎄, 네.} 격하된

    다라는 것도 이상하고.

    남: 그게 후작, 백작이라면 또. {최: 예.} 그것이 하나 이렇게 다운(down) 되는 경우는 있어요. 그렇

    지만 3대는, 3대[까지]는 똑같이 후작. 4대째 이제 우리 [사촌]오빠한테 준다면, 그게 하나 격하

    돼서 [백작]. {최: 예예.} 그래도 그 남작은 정말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어요. 그때 얘

    기를 듣고.46)

    최: 공작(公爵), 후작, 백작,

    남: 백작.

    길: 자작(子爵). 남작.

    최: 자작, 남작인데. 이 순위가, 서열이……

    남: 네. 그래도 왜 그리 끝으로 갔는지. 후작 다음에. 네.

    최: 시기적으로도 이게 맞지가 않고……

    남: 모르는 분이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분이 그냥 상상으로 (웃음)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

    는……

    최: 제가 보기에는 이왕가에 대한 정확한 자료들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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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없죠.

    최: 소홀한 것 같아요.

    남: 없어요. 네.

    최: 네. 사실 연도도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닌데. {남: 네.} 정확한,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는데 어쨌든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때는 이왕가, 이왕가가 어쨌든 일종의 뭐랄까…… 경계의 대

    상이었죠. 예.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남: 이승만 대통령이 영친왕 전하, 일본이 그렇게 된 다음에 일본의 귀족이 다 없어졌잖아요? (손짓

    을 하며) 그래서 영친왕 전하께서 굉장히 고생을 하셨어요.47) {최: 예.} 경제적으로도 그랬는데,

    제가 이방자48) 여사께 직접 들었어요. 직접 들은 게, “정말 한국에 오고 싶다.” 영친왕 전하께서

    “그냥 고국에 가서 가만히 살겠다. 그냥 우리를 좀 한국에 가게 해다오.” 몇 번 진정을 하셨는데

    이승만 씨가 대답도 안 했어요. {최: 네.} 그 이승만 대통령이 이씨예요. {최: 네.} 전주 이씨. 그

    래서 자기도 왕가의 후손이라고.

    최: 전주 이씨구나. 네.

    남: 예. 굉장히 프라우드하고, 그리고 운현궁을 경무대(景武臺)49)로 쓰려고 그랬었어요.

    최: 아, 그래요?

    남: 예. 그건 제가 운현궁 아주머니50)한테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프란체스카 여사51) 하고, (웃으며)

    이건 큰아버지하고 관계 없는 얘기인데 해도 돼요?

    최: 아이, 괜찮습니다. 예.

    남: 프란체스카 여사하고 [이승만 씨] 두 분이 운현궁에 오셨는데.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양 사람 아

    니에요? (웃음) {최: 예예.}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 실내에서 신발 신고 다니잖아요. 운현궁 대청

    에 구둣발로 올라왔대요. (양 손으로 걷는 흉내를 내며) 프란체스카 여사가. 운현궁 대청을. 그

    집을 둘러보러 온 거예요. 자기네가 경무대로 쓰려고. 그랬는데 이분이 왕가에 대한 아주 특별

    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래 가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 그래서 결국은 내 동생, 그 앤 죽었는

    데. — 그, 우 공, 이우 {최: 예. 이우 공.} 아저씨께서, 그 미망인이 박찬주(朴贊珠,

    1914~1995)52) 여사인데, 우리 아주머니.

    최: 지금 덕성여대 뒤에 그 건물이 그게……

    남: 그렇죠. 덕성여대 양관53)도 운현궁이었죠.

    최: 예. 운현궁에 같이 있고. 이우가. 이우 공이. 예.

    남: 그렇죠. 네. 그런데 우리 아주머니께서 정말 똑똑한 분이세요. 해방이 되고 그 운현궁을 (손짓을

    하며) 우리 오빠[이청]54) 이름으로 사유화하셨어요, 법적으로. 운현궁이니까. 창덕궁 그런 것처

    럼 국가로 다 넘어가는 건데. {최: 네.} 그것을 사유재산화하셨어요, 법적으로. 그래서 운현궁이

    우리 오빠 거예요. 국가 게 아니고. 그랬는데. 오빠하고 동생

    최: 양관은 이우 공으로, 소유가

    남: 아니, 양관은 이제 우리 아주머니께서 생활이 곤란하시니까 덕성여대에 판 거죠.

    36

    47) 1954년 9월 23일 이승만 정권(1948~1960)이 제정한 구황실재산법(舊皇室財産法)으로 인해 영친왕 등 구 황실의 재산은 강제로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이 법령은 1963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으로 폐지된다.

    48)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일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이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은(李垠)의 비이다.

    49) 청와대(靑瓦臺)의 이전 명칭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이 경복궁(景福宮)의 ‘경(景)’ 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 자를 따와 ‘경무대(景武臺)’로 명명했다. 하지만 제2공화국이들어서자 독재의 대명사로 인식된다는 이유로 윤보선(尹潽善, 1897~1990)에 의해청와대로 개명되었다.

    50) 이남주 선생은 박찬주 여사를 계속해서 ‘운현궁 아주머니’ 혹은 ‘우리 아주머니’라 부른다.

    51)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Rhee, 1900~1992).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이다.

    52) 개화파 정치인 박영효(朴泳孝,1861~1939)의 서손녀이며, 흥선대원군의적장손인 이준용의 양자 이우의 부인으로운현궁의 종부(宗婦)였다.

    53) 운현궁 양관(洋館)은 1912년 일본이왕족을 회유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에게 지어준 저택으로 알려져있다.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하자이준용은 이준(埈)으로 개명하고 이 저택을 상속받는다. 1917년 이준이 사망하자양자인 이우가 계승해 이우공저( )로 불리기도 했다. 1948년부터 덕성여대에서 본관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덕성여대 법인사무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54) 이청(李淸, 1936~ ). 이우 공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사망 이후 공위를 계승하여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다.1993년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였으며,흥선대원군과 왕실 관련 문화재를 다수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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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 구술자가 집안에서 ‘장’이라 불렀다한다. 그러나 매체의 기록에는 ‘이종(李淙,1940~1966)으로 확인된다. 이우 공의 차남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브라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마쳤고 박사과정 중이던 1966년 12월 24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56) 전주 이씨이며,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선교사 J.R.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아이오와주(州) 데이버대학을 졸업하였다. 1945년 이승만(李承晩)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49년 서울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했다.

    57) 이강석(1937~1960).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춰 양자로 입적되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지 이틀 뒤인 4월 28일 경무대에서 친부모인 이기붕과 박마리아 그리고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쏜 뒤 자신도 자살했다.

    58) 이구(李玖, 1931~2005). 영친왕 이은의 차남으로 미국인 줄리아 멀록(JuliaMullock, 1923~ )과 결혼했으며, 미국으로 귀화했다.

    59) 이진(李晉, 1921~1922). 영친왕 이은의 장남으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1922년 5월 11일 영친왕 조선 방문 시 급사하였다.

    60) 이남주 선생은 이방자 여사를 계속해서 ‘비 전하’라 부른다.

    최: 아, 파신 거구나.

    남: 사유화했는데, {최: 네.} [양관은] 덕성여대에 파신 거고. 이승만 대통령[부인]이 그 구둣발로 대

    청을 돌아보고 이제 그걸 당신이 갖고 싶었는데, 경무대로 쓰고 싶었는데, 사유화된 집이니까

    대통령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그 대신 내 동생을 양자를 삼고 싶어했어요. �